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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것저것 써보고 있는 자아 D입니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금토 드라마 '밤에 피는 꽃'에 등장한 여묘살이 뜻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밤에 피는 꽃'은 십오 년 차 수절과부 (이하늬분)와 사대문 안 모두가 탐내는 종사관 수호(이종원)의 아슬아슬 코믹 액션 사극입니다.
그럼 여묘살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묘살이
여묘 살이는 부모상을 당하여 상주가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놓고 묘소를 돌보며 삼년상을 치르는 일을 가리킵니다.
여묘살이는 예의 규정은 없으나, 공자 때부터 있었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효행의 덕목을 내세워 유교식 상례를 권장하고자 시행하였습니다. 여묘살이의 거처인 여막은 초막이나 묘 옆에 지은 재실도 가능했습니다.
조선 후기 유교식 상례의 반곡(反哭)이 보편화되면서 궤연에 거적을 두른 여막에서 하는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묘 살이는 신주를 중시하는 중국식과 혼백도 중시하는 한국식이 대립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양쪽을 함께 중시하는 한국식 의례로 정착되어 지속되었습니다.
여묘살이의 다른 말
여묘살이를 다른 말료 시묘, 시묘살이라고도 했습니다.
기록에는 여묘삼년(廬墓三年), 여총삼년(廬塚三年), 여묘(廬墓), 여묘종제(廬墓終制), 여묘복 삼년(廬墓服喪三年), 거려(居廬), 여분삼년(廬墳三年), 여묘진제(廬墓盡制), 묘려(墓慮), 지복시묘(持服侍墓), 수려 진제(守廬盡制), 여우묘 측(廬于墓側), 여분삼재(廬墳三載), 삼 년 시묘(三年侍墓) 등 다양합니다.
여묘살이의 역사
삼년상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여묘살이에서 여막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고 합니다. 고려 의종 때 손응시孫應時, 명종 때 장광부張光富의 여묘 3년 효행 기록되어 있으며, 경주의 손시양孫時揚이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러 정문旌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최누백崔累伯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복수한 다음 3년 동안 여묘廬墓에서 살았다는 기록, 정몽주가 여막에서 삼년상을 치렀다는 기록 등이 있습니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도입한 조선시대가 되면 여묘살이로 삼년상을 치른 백성에게 국가가 상을 내린 기록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장지葬地에서 신주神主를 조성하여 집으로 모셔오는 반곡反哭(장사를 지낸 뒤 혼백 혹은 신주를 영거에 모시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면서 하는 곡)의 절차가 있어 여묘살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노수신盧守愼(1515~1590)과 김우옹金宇顒(1540~1603) 논쟁입니다. 노수신이 “민간에서 반혼返魂(장례 후에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의례)의 예를 행함으로써 상례의 기본이 무너져 풍속이 야박해지고 있다.”라고 하자 김우옹은 “반혼이 고례古禮인데, 여묘를 하려고 반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가 아니라.”라고 반론하고 있습니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둘의 주장이 옳다고 중재하고 단지 상을 치르면서 근신하지 않는 자만 적발하는 것으로 일단락된 유명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오늘은 MBC 금토 드라마 '밤에 피는 꽃'에 나온 여묘 살이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여묘살이는 부모님 상을 당하면 무덤에 여막을 만들어 3년상을 지낸다는 뜻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