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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것저것 써보고 있는 자아 D입니다.

오늘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적극 가담 했다는 국방부의 언론 브리핑 자료를 나눠 줘서 그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육사 앞에 있는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옮기겠다는 정부는 무슨 생각일까>   <==홍범도 장군 흉상을 옮기겠다는 정부의 변명으로 나온 대답인데요.

이날 국방부 언론 브리핑에서 기자와 대변인이 논쟁을 한 영상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자에게 혼나는 대변인도 참 자신이 논리에 안 맞고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인데요 어쩌겠습니까 위에서 시키니 해야 하는 위치라서

역사-논쟁하는-국방부
홍범도 장군을 자유시 참변에 가담 의혹이 있다고 언론 브리핑을 하는 국방부

우선 자유시 참변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유시 참변

1921년 6월 27일에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 인근인 수라젭카(Суражевка)에서 사할린 한인 부대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 빌리가 지휘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한 사건입니다.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헤이허 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합니다.

 

정말 복잡한 사건인데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1920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 측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펴게 됩니다. 그러자 이 지역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군은 점점 러시아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는데요. 자유시 인근인 수라젭카라는 곳으로 여러 부대들이 모이게 됩니다. 여럿 부대가 모이면 여러 지휘관들이 모이게 되고 그럼 알력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 지휘관중에 몇 명이 러시아 쪽에 붙어서 러시아 쪽 군대와 같이 독립군들을 무장해제 시킨 사건입니다.

자유시 참변 피해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로 고려혁명군연혁(在露高麗革命軍沿革)』에는 의용군 측이 사망 36, 포로 864, 병자로 불참한 자 15, 박일이야가 전투 중 인솔하고 도망한 자 34, 행방불명 59명이며, 군정의회 측은 사망 2명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도 방면 11개 단체 성토문에는 의용군 측 전사 72, 익사 37, 산중에서 힘이 다해 사망한 자 250여 명, 포로 917명, 군정의회 측은 적군 1명만이 사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7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범도 자유시 참변 책임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 과정에서 고려혁명군 편에서 대한의용군 소속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낭설에 가깝습니다.

 

1921년 3월께 자유시에 도착한 홍 장군은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었습니다.

 

양측 모두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홍 장군으로서는 통합 주도권의 향방엔 관심이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돼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해석입니다.

 

공식 사료에도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기록은 있지만, 이는 신속한 사태수습을 원한 고려혁명군 측이 독립군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홍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추대했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자유시 참변 연구 권위자인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홍 장군이 고려혁명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하고, 참변 이후 벌어진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왜곡된 주장이 나오는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궤멸?

보수성향 커뮤니티들에선 또 자유시 참변으로 자유시에 모였던 2천여 명의 독립군 중 700∼800명이 사망해 사실상 독립군이 궤멸했다는 주장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설명하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보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론 사망자가 36명,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총 600여 명입니다.

 

또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소속 군인이 864명이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사망자가 700∼800명이라는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대한의용군 병력이 1천 명 내외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윤상원 교수는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고려혁명군 중심으로 모인 독립군이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다"면서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립군이 궤멸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글을 마치며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많은 괴담이 돌고있습니다. 특히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왜 옮겨져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의문 부호가 켜진 상태에서 국방부의 말도 안 되는 브리핑이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을 때는 이런저런 기록을 합쳐서 평균값을 내면 되는 일입니다. 자유시 참변이라고 부르는 자유시 사변 정도로 불러야 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기록에도 전혀 없는 홍범도 장군의 자유시 사변의 참가는 어디 자료에서 나온 것인지 국방부는 그것부터 밝혀야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때 부터 지금까지 독립영웅으로 추대받고 전 정부에서 유해가 한국땅에 들어왔습니다.

왜 지난 정부들이 해왔던 노력과 유해를 돌려준 카자흐스탄 정부를 허투루 돌리는지 정부는 잘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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